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시를 통해 우리 교육 현실을 직시하고 참교육의 길을 모색해 온 배창환 시인의 육필시집.
표제시 <소례리 길>을 비롯한 50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다.
지은이
배창환은 195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1979년 10·26 사건과, 12월 12일 쿠데타에 의한 전두환 신군부 등장, 그리고 이듬해 1980년 민주화의 봄과 5월 광주 항쟁, 민주주의를 향한 꿈의 좌절에 이르는 기간을 겪으며 경북대 국어교육과에서 유일한 문학 동아리였던 복현문우회(복문)에서 ‘순수시’의 자장에서 벗어나 김수영, 신동엽 시인을 비롯해 신경림, 고은, 정희성,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김광규, 김명인 같은 시인들의, 현실 의식을 바탕으로 육화해 온 시와 산문을 공부했다. 첫 시집 ≪잠든 그대≫(민음사, 1984)는 그 시절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났던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좌절,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객관화해 응시하면서 노래해 온 기록이다.
1985년 ‘교육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민중 교육’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교육 운동에 참여했다. 대구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에 가입해 적극 활동했고, 평교사회 건설 운동과 교육 민주화 운동, 마침내 1989년 전교조 결성에 이르기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기에 해직은 이미 예정된 길이었다. 제2시집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실천문학사, 1988)와 제3시집 ≪백두산 놀러 가자≫(사람, 1994)는 주로 이 시기 교육 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시로 형상화한 교육 시편들로 구성되었다.
10년 만에 교단으로 돌아왔지만 10년 전보다 입시 교육이 더 심각해졌고, 아이들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듯 많이 달라져 있었다. 좀 더 새롭고 ‘창조적’인 삶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솟았고 삶을 바꾸기 위해 성주로 귀향했다. 제4시집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창작과비평사, 2000)은 귀향과 복직 전후에 쓴 삶의 기록들이다.
현재 그는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는 흙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확인 중이다. 수업시간에 그와 함께 시를 공부한 김천여고 116명의 아이들이 쓴 창작시집 ≪뜻밖의 선물≫(2007, 나라말출판사), 김천여고 아이들의 창작 수필집 ≪어느 아마추어 천문가처럼≫(2009, 나라말출판사)이 그 산물이다. 제5시집 ≪겨울 가야산≫(실천문학사, 2006)은 귀향 이후 지금까지 흙과 아이들 곁으로 돌아온 그의 삶의 진솔한 기록이다.
그는 지금도 ‘어떻게 하면 오늘의 나를 갱신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길 위에 있다.
차례
자서
1부 시인의 비명(碑銘)
시인의 비명(碑銘)
소례리 길
가야산 시(詩)
사는 일
썰물
늦가을에
그날 백두
좋은 사람들
시론(詩論)
폐교에 대한 보고서
나의 집
당신의 아름다운 별들
2부 겨울 가야산
겨울 가야산
눈 오는 날의 벽진중학교
얼굴
눈길
겨울 언덕에 고삐 풀린 너는 잠들고
빛과 그늘
산골 마을 은행나무
아버지의 추억
아이에게
꽃
나무 아래 와서
햇살 한 줌
3부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저물 무렵
내 시(詩)
내 꿈은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흔들림에 대한 아주 작은 생각
무밭에서
길
다시 십 년 후, 옛집을 지나며
저문 날 가야산에 올라
저 풍경
산 위에서 똥 누다
꽃에 대하여
길 2
다시, 처음으로
4부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아름다움에 대하여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각서 쓴 날
수업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남아
첫눈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새벽 노동
새벽 모닥불
거리에서
봄날
잠든 그대
배창환은
책속으로
소례리 길
-김종림 선생 추모비에 와서
합천 청덕 소례리 길 십수 년 만에 다시 오르다
흐르는 물길은 그대로인데 사람 길은 무심히 흩어져 풀섶에 멈춰 있고 볕 잘 드는 산허리, 그 옛날 그 자리엔 내가 글 쓰고 신영복 선생 글씨 받아 새긴 하얀 묘비명이 아직 깊고도 선명하다
동지는 이곳에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나와 헤매었던가. 우리가 이룬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또 무엇이었던가. 사람이었던가, 깃발이었던가, 우리가 언제 그대를 여기 묻었던가…
눈 감고 무릎 꿇으니 그 많던 뻐꾸기들 다 어데 갔는지 흔적 없고, 비명(碑銘) 발치엔 붓으로 그린 듯 하얀 찔레 한 무더기 돋아, 이 마을에선 모르는 이 없는 그를 깡소주 한 병에 푸른 하늘 아래 맡겨 두고, 봄비 젖은 흙길을 터덜터덜 내려오다
자서(自序)
나와 함께 걸어 온 시(詩)들을
뽑아 엮었다
삐뚤삐뚤,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따스하면서 따갑다
갈 길이 아직은 한참 멀다